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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언제 운전대를 놓을까

“이제부터 당신이 내 운전사에요.”     아내가 풀러턴 차량국에서 가주 운전 면허증을 반납하고 그 대신 신분증을 받은 다음 나에게 던진 말이다. 내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기우뚱 기우뚱 겨우 걷는데 운전까지 하라니. 하기는 평생 내가 운전했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면 불안했다.   구순이 지난 나는 팔다리 살이 많이 빠지고 시력도 전과 같지 않다. 눈이 텁텁하고 잘 보이지 않는다. 피로하면 바른쪽 눈이 반으로 감긴다. 백세까지 운전하겠다고 떵떵거리지만 희망뿐이다. 시력이 악화하면 내일이라도 운전대를 놓아야 한다.   지난 11월22일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온 지 정확히 50년 즉 반세기가 되었다. 엘세군도 근방의 연방정부 청사에서 일하며, 105번 고속도로를 오가다 보니 어느새 은퇴할 때가 되었다.     ‘아직 못 가의 봄풀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는데 앞 계단의 오동나무 잎은 가을을 알려 준다(미각지당춘초몽 계전동엽이추성·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秋己聲)’는 주자(朱子)의 글대로 세월이 흘렀다.   나는 60세에 은퇴하고 30년을 살았다. 일생을 20년 성장기, 40년 작업기, 30년 노후기로 나누어본다. 그리고 앞으로 10년은 하늘이 주시는 보너스기다.   이민 반세기 동안 몇 건의 ‘펜더 벤더(fender, bender)’, 즉 가벼운 사고 이외에 큰 사고 없이 운전했다. 그러나 사고가 날 뻔한 근사(近似) 사고는 무수히 많다. 그런 사고의 날짜, 장소, 원인, 후속 조치, 등을 노트에 기록해서 사고 방지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운전은 위험한 작업이다. 미국안전협회(National Safety Council) 발표에 의하면 전국에서 매일 평균 100명이 차 사고로 사망한다고 한다. 사실은 자동차 운전이 비행기 운전보다 더 위험하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큰 사고를 낼 수 있다.   나는 15, 16세 때 황해도 장산곶의 산골짜기에서 두 바퀴가 달린 달구지를 끌고 산으로 나무하러 다녔다. 나무를 가득히 싣고 비탈길을 내려오다가 소고삐를 놓치면 바퀴에 깔려 죽거나 다칠 수 있다. 달구지를 가지고 산으로 나무하러 갈 때는, 죽은 사람의 입에 넣어주는 ‘사지(死地) 밥’을 싸 가지고 간다는 말이 있다.   17세 때 월남해 인천 미군 유류 저장소에 안전관리 요원으로 취업했다. 하는 일은 직업 안전과 차량 사고 방지였다. 달구지와 차 조심은 같은 맥락이다. 수송부에 수 십대의 트럭과 지프를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민간인과 카투사 운전사의 안전 교육을 담당했다. 보수 교육(Remedial training)으로 매주 ‘5분 안전교육’을 실시했다.   한번은 미군 차량과 한국인 보행자의 충돌사고로 한미 간 마찰이 있었다. 큰 골칫덩어리였다. 사고를 방지하려면 방어 운전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대방의 불안전한 행동을 예상하고 대응하는 자세로 운전한다. 예를 들어 길가에서 놀던 어린이가 공을 잡으려고 차량 앞으로 뛰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운전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비하라(Expect the unexpected)는 것이다.   미국에 와서도 그 당시 가르치던 방어 운전의 원리와 기타 안전 요령(safety tips)을 염두에 두고 운전했다. 몇 가지 예를 든다. 도로 상태에 비하여 과속하지 않는다(Never drive too fast for road conditions). 앞 차의 뒤만 주시하지 말고 넓게 본다(See the big picture). 상대방이 당신이 볼 수 있도록 운전하라(Let them see you). 갑자기 나타나지 말라는 뜻이다.   아무리 방어 운전을 해도 75세 이상 특히 90세가 지나면 시력, 청력, 체력, 순발력의 저하로 사고 발생 확률이 높아진다. 자신의 운전 능력을 가늠하고 운전대를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 보험회사, 차량국, 또는 자식(!)들이 자동차 열쇠를 빼앗을 수 있다.   다음처럼 불안전한 행동을 하면 운전대를 놓으라는 신호다. 머뭇거리면서 회전한다. 차선을 바꾸기가 힘들다. 과속하거나 저속으로 운전한다. 주차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회전이나 후진할 때 커브를 긁는다. 위험을 인식하지 못한다. 차체에 온갖 상처를 낸다. 가스와 브레이크 페달을 혼동한다. 길을 자주 잃는다.   지난주 병원 주차장에서 후진하다가 커브를 긁어 펜더에 흠집을 냈다. 운전대를 놓으라는 신호인가. 좀 두고 보자. 달구지와 사지 밥, 방어 운전, 안전 요령을 총동원해 운전하고 있다. 깜빡 깜빡 신호가 오면 아내처럼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할 것이다. 윤재현 / 수필가문예마당 운전대 수필 카투사 운전사 방어 운전 자동차 운전

2024-12-12

[수필] 시니어도 때로는 만용을

노년에 접어드니 별일도 아닌데 용기를 시험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난다. 그중에 대표적인 일이 운전이다. LA 변두리에 사는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LA, 한인타운 또는 인근 도시를 맘 놓고 운전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프리웨이를 타고 좀 멀리 다니는 일엔 용기가 필요해졌다. 그런데 몇 달 전에 남편이 한국에서 돌아왔다. 남편도 운전대를 놓은 지 오래됐다. 한국에서는 지하철이 잘 돼 있어 굳이 차를 몰고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둘째 아들은 오래 운전을 안 하던 아버지를 염려해서 자동차 운전 보험에 들어 있던 남편 이름을 미리 빼서 원천적으로 남편의 운전을 봉쇄하려 했다. 그러나 손이 근질근질한 남편이 인근 마켓이나 커피숍을 자유자재로 운전해 다니는 걸 보고 봉쇄를 풀어줬다. 그 이후 나는 운전대를 남편에게 넘기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이제는 가까운 거리도 직접 운전하는 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큰아들이 보고 싶다며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큰아들 집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왕복 800마일이 족히 되는 거리를 직접 운전해서 말이다. 나와 작은아들은 그건 만용이라고 말렸다. 그러자 남편은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찬성과 반대가 반반이었다. 남편은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는 거라’고 하며 결행하기로 했다. 노인의 무기력을 거부하고 용기와 결단력을 시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장거리 자동차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1번 하이웨이를 따라 북상하면서 서해안과 빅서의 절경도 둘러보고 가려 했으나 무박 하루 일정으로는 무리라 해서 5번, 580번 그리고 680번을 따라 직행했다. 큰아들은 염려가 되는지 자신이 LA로 내려오던지 아버지가 비행기를 타고 오시던지 하는 게 좋겠다고 했으나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러자 가는 내내 수시로 졸음운전 조심하라고 경고를 보냈다. 옆에 동승하고 있는 나도 약간 불안한 마음이었다.       끝이 안 보이는 벌판을 일직선으로 달리는 5번 프리웨이는 여름내 가물어 풀들이 바싹 말라서 산과 들녘이 온통 황금빛의 연속이었다. 너무 단조로워 졸리기도 했지만 훗날 이 여행을 무척 그리워할 생각을 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10월 21일 아침 8시쯤 출발하여 가끔씩 보이는 오렌지, 포도, 아몬드 과수원 밭 외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길을 따라 350여 마일 거리를 7시간 정도 달려 아들 집에 도착했다. 중간에 주유도 하고 잠시 쉬기도 했다. 80이 훌쩍 넘은 백발의 아버지가 멀리 사는 아들이 보고 싶어 직접 운전을 해서 달린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알아줄까?       다음날, 아들은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공부하라며 우리를 새크라멘토 인근의 이곳저곳 역사의 현장으로 데리고 다녔다. 아들의 안내로 오번(Auburn) 이라는 개척시대 세워진 작은 도시에서 골드러시 박물관과 플레이서 박물관, 새크라멘토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 철도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오후에는 남편이 운전대를 잡고 동쪽에 새로 생긴 작은 도시인 브랜트우드로 한 시간을 달려 옛 친구 집을 방문하고 밤늦게 아들네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 23일 아침 8시, 아들네 집을 떠나 오던 길을 되짚어 6시간을 달려 오후 2시에 집에 도착했다. 2박 3일, 800마일 이상을 무사히 주파한 것이다. 남편은 생전에 단행해 보지 않은 장거리 여행을 80대 중반에 손수 운전으로 해냈다고 “아직 살아 있네!” 라며 성취감에 넘쳐 있다.  멀리 있는 큰아들도 만나고 오랜 친구도 만났다. 나도 모처럼 아들을 만난 것도 큰 기쁨이지만 내가 알지 못하던 북 캘리포니아의 명소를 방문했다는 것도 큰 보람이었다.     골드러시 촌 오번에 있는 사금 채취장은 흔적만 남아 있고 그 터에 소규모 전시관이 있다. 외곽에는 사적지로 지정된 50여채의 고풍스러운 외관을 띤 빅토리안 스타일, 골드러시 당시의 건축 양식이 그대로 살아 있는 건물들이 있어 서부 개척시대의 정취를 느꼈다. 19세기 미국 전통 복장을 한 현지인과 기념촬영도 할 수 있는 새크라멘토 대표 관광지구로 미국판 민속촌이다.       내가 엄청 감명을 받은 곳은 새크라멘토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 철도박물관 (California State Railroad Museum)이다. 미국 유수의 철도 박물관 중의 하나인 이 새크라멘토 철도 박물관엔 서부개척시대 이후 대륙을 달리던 각종 철도 기관차와 객차 21대가 완전히 복원되어 종류별로 전시돼 있다. 그 규모가 엄청나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미국의 힘이 느껴졌다. 19세기 말부터 이런 거대한 철마가 대륙을 달릴 때 우리나라는 어땠나? 청나라에 매이고 일본의 침탈을 당하고 했으니 부끄럽고 비교가 안 된다. 어쨌든 한번은 와 봐야 할 명소였다.   한국인이 살지 않아 한인 마켓도 없는 브랜트우드에 사는 남편 친구는 외교관 출신으로 LA 부총영사를 비롯해서 여러 나라 대사를 지내다 은퇴헸다. 지금은 결혼한 딸 근처에 사는데 그야말로 아침에 커피 마시고 산책하고 책 읽고, 수도자처럼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차도 없을 뿐 아니라 함께 사는 큰딸의 차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헤어질 때 친구분이 “우리 한 번은 더 볼 수도 있겠네” 라는 말에 가슴이 찡했다.     우리 부부는 모처럼 멀리 사는 큰아들을 직접 찾아가 즐거웠고 남편 친구와 반갑게 만나 그동안 못 풀었던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없는 캘리포니아의 역사적 명소도 방문했다. 더욱이 남편은 장거리 운전에 성공한 자신감으로 기분이 한층 고조됐다. 그러니 이번 여행은 1거 3득이 아닐 수 없다. 2박 3일에 걸친 800여 마일 운전 여행은 우리에겐 시도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벤트였다. 젊은이들에게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우리에겐 망설임 가운데 결단이 필요한 사건이었다. 긍정적인 용기와 결단만 있다면 노년은 그렇게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일상의 연속은 아닐 것이다.   배광자 / 수필가수필 시니어 만용 박물관 새크라멘토 장거리 여행 자동차 운전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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